메달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
한국 주요 선수 5명의 특이 이력
결과가 전부가 아닙니다.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읽으면, 메달이 두 배로 빛납니다.
동계올림픽이 보여준 것
스포츠에서 기록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2026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총 10개의 메달을 땄습니다. 금 3개, 은 4개, 동 3개입니다. 종합 순위 13위, 전 대회보다 1개 더 딴 성과입니다.
그런데 이번 동계올림픽, 숫자보다 이야기가 더 많았습니다. 17세 고등학생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노보더를 꺾었고, 20년 만에 처음 등장한 한국 스노보드 크로스 선수가 나왔습니다. 논란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했던 선수가 다시 올라 역사를 썼고, 피겨 왕자가 사실 어린 시절 TV 드라마에 나온 아역배우였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단순히 한국이 잘 싸운 대회가 아닙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 무대에 서기까지 긴 여정을 걸어온 선수들의 이야기가 담긴 대회입니다. 지금부터 한 명씩 살펴보겠습니다.
최가온 — 17세 고교생 금메달리스트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꿈이었던 아이 →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입니다. 2008년생, 경기도 양평 출신. 세화여고에 재학 중인 17세 고등학생입니다. 1차 시기에서 넘어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3차 시기에서 90.25점을 기록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따로 있습니다. 최가온의 원래 꿈은 피겨스케이팅 선수였습니다. 어릴 때 김연아를 보고 싹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를 처음 봤을 때, 파이프 안으로 들어가는 그 웅장함에 반해 꿈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최가온의 롤모델은 다름 아닌 클로이 김입니다. 클로이 김이 어린 최가온을 미국으로 초청해 훈련을 도울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우상이자 스승을 동계올림픽 결승에서 꺾은 것입니다. 시상대에서 클로이 김은 최가온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넥워머를 직접 내려줬습니다.
2017년 9살 때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스노보드 신동으로 출연했던 아이가 8년 만에 동계올림픽 챔피언이 됐습니다. NBC는 이번 대회를 통해 떠오른 세계 스타 13인 중 한 명으로 최가온을 선정했습니다.
최민정 — 한국 역대 최다 메달 신기록
3번의 동계올림픽, 단 1번도 빈손 없음 → 한·동·하계 통틀어 한국 역대 최다 메달(7개) 신기록
쇼트트랙의 '얼음공주'. 별명이 무표정에서 나왔습니다. 일등을 해도 잘 웃지 않는 선수로 유명합니다. 동료들이 제발 좀 웃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최민정이 밀라노 시상대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유는 기록이었습니다. 평창 2018, 베이징 2022, 밀라노 2026. 세 번의 동계올림픽에 모두 출전해 단 한 번도 메달 없이 빈손으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추가하며 개인 통산 올림픽 메달을 7개(금 4·은 3)로 늘렸습니다.
(전이경과 공동 1위)
진종오, 김수녕, 이승훈이 각 6개로 공동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민정이 그 기록을 혼자서 넘어섰습니다. 동계올림픽 종목으로만 달성한 단독 기록입니다.
경기 후 최민정은 이번 동계올림픽이 마지막이라고 밝혔습니다. 후배 김길리가 자신의 1500m 금메달 자리를 물려받는 순간을 직접 만들어 주며 레전드의 마무리를 완성했습니다.
차준환 — 아역배우에서 피겨 왕자로
2005~2009년 아역배우 활동 → 방학 특강으로 스케이트 입문 → 동계올림픽 개회식 기수 + 한국 남자 피겨 역대 최고 성적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선수입니다. 차준환은 2026 밀라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총점 273.92점으로 4위를 기록했습니다. 3위 일본 사토 슌(274.90점)과 단 0.98점 차이였습니다.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이력이 있습니다. 차준환은 어린 시절 아역배우였습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광고, 드라마, 잡지에 출연했습니다. 배우의 꿈을 키우다가 방학 특강으로 스케이트를 처음 탔고, 빙판 위의 자유로운 느낌에 빠져 선수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쉬운 4위)
(평창 15위 → 베이징 5위 → 밀라노 4위)
차준환은 만 14세에 쿼드러플 살코를 세계 최연소로 성공한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178cm의 큰 키는 피겨 선수에게 불리한 조건이지만, 그 스케일을 활용해 오히려 더 웅장한 점프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동계올림픽 폐막 후 차준환은 갈라쇼에 특별 초청되어 한국 가수 송소희의 노래에 맞춰 연기하며, 전 세계 관중에게 한국 음악을 알렸습니다.
황대헌 — 논란 딛고 3회 연속 시상대
팀킬 논란·대표팀 탈락의 오명 → 복귀 후 한국 쇼트트랙 최초 3회 연속 개인전 메달
황대헌의 이번 동계올림픽 은메달은 단순히 '2등'이 아닙니다. 한때 '반칙왕'이라고 불리며 대표팀에서조차 빠졌던 선수가 다시 올라온 이야기입니다.
2024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료 박지원에게 잇달아 반칙을 범하는 이른바 '팀킬 논란'으로 대표팀 자동선발에 실패했습니다. 일부 시즌에는 아예 대표로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황대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회 연속 개인전 메달
동계올림픽 메달 수
1500m 기록 차이
평창 2018 은메달, 베이징 2022 금메달, 밀라노 2026 은메달. 세 번의 동계올림픽에서 매번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한국 쇼트트랙 남자 선수 최초로 3회 연속 개인전 메달을 따낸 기록입니다. 이번 대회 폐회식에서는 최민정과 함께 한국 선수단 공동 기수를 맡았습니다.
김길리 — 최민정의 계보를 잇다
넘어짐·실수·눈물을 반복한 선수 → 3개 메달로 최민정의 왕좌를 물려받은 '쇼트트랙 새 여왕'
김길리는 22세입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3개의 메달을 따냈습니다. 그중 1500m 금메달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까지, 이 종목 금메달은 언제나 최민정의 것이었습니다. 김길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놀라운 건 이 장면의 구도입니다. 결승에서 최민정이 2위, 김길리가 1위였습니다. 선배가 만들어 준 레이스 흐름 위에 후배가 올라선 순간이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한 김길리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최민정이 따뜻하게 안아줬습니다.
(금2·동1)
이탈리아 제치고 우승
특히 여자 3000m 계주 결승은 극적이었습니다. 최하위권에서 출발했던 한국 팀이 김길리의 역전으로 이탈리아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탈리아 홈 관중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만들어 낸 반전이었습니다.
결론 — 동계올림픽이 남긴 유산
숫자로만 보면,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금 3·은 4·동 3, 총 10개 메달로 13위에 올랐습니다. 전 대회보다 1개 늘었고, 목표인 10위 이내에는 아쉽게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로 보면 다릅니다. 한국 최초 설상 금메달(최가온), 한·동·하계 통틀어 역대 최다 메달(최민정), 한국 남자 피겨 역대 최고 성적(차준환), 한국 쇼트트랙 최초 3회 연속 개인전 메달(황대헌), 쇼트트랙 새 여왕의 탄생(김길리).
이 모든 기록은 동계올림픽이라는 무대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4년을 기다려야 오는 그 무대. 선수들은 그 4년 동안 부상과 논란과 눈물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다시 빛났습니다. 다음 동계올림픽은 2030년 알프스입니다. 이 선수들이 그 무대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쓸지, 지금부터 기다려집니다.